안녕하세요~! 오늘도 여러분의 설교나 성경공부를 돕고자 글을 씁니다.
정리와 설교 포인트는 가장 아래에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4장, 5장에 대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3장의 말씀을 통해 선악과를 먹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며 반역임을 보았으며, 이것이 죄라는 이름을 가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 죄를 짓는 사람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피하게되고 두려워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돕는 배필이며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서로를 탓하게 되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파괴,
그리고 본래 순종하여 열매를 내어주던 자연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자연과의 관계 파괴,
아담(흙)이 흙을 파헤치며 일하고 살게 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파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죄의 4중 파괴성이라고 합니다.
또한 죄의 가장 큰 결과는 안식이 사라지고, 죽음이 들어왔다는 것이였습니다.
죽음이 나타났다는 것은 본래 좋은 것(토브)이였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로가, 노동과 출산 등등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변질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상황 가운데, 4장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아버지인, 처음 죄를 지은 존재인 아버지보다 더 악하게 산 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더 큰 형벌을 받고,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존재가 됩니다.
4장을 보겠습니다.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1절의 하와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라고 말하는 것은 자손을 낳는 복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1장에서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복과 사명을 주셨는데, 에덴에서 쫓겨났음에도 하나님께서 그 복과 사명을 거두지 않으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은혜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두 종류의 사람, 농사꾼과 목축업 종사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그 유명한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단 두 사람은 아담보다는 낫습니다.
아담은 제사장적 역할을 못했지만, 가인과 아벨은 자신의 노동의 결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두 사람 다 자신의 소산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차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는 그 원인에 대해 침묵하지만, 우리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육식주의자이다. (피가 없기 때문)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피의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사의 경우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도 존재하며, 성경을 보면 제사의 형태는 지니나 제물이 없는 경우(야곱의 벧엘 제단 등)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2. 첫 소산의 차이
이 역시도 많은 분들이 그 원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애매한 것이, 첫 새끼라는 것이 더 정성을 들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첫 새끼라는 것은 첫 생산물이란 뜻이며, 가인의 땅의 소산이란 것 역시 가인이 처음으로 수확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첫 새끼라는 표현이 정성의 표현이 아닌, 그들이 노동해서 얻은 첫 제물이라는 것이죠.
3.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
하나님이 그들의 삶의 자세를 보고 결정하셨다는 이론입니다. 성경은 제물만이 아닌 '가인과 그의 제물', '아벨과 그의 제물' 이라고 말합니다. 즉 제사를 드리는 제사자 자체가 하나의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예배를 드리는 행위, 헌금을 하는 행위가 아닌 그 예배자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삶의 모습이 제물로서 합당치 않으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인의 삶의 태도는 가인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자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미 죄에 오염된 모습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가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여쭤봐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의 제물은 안 받아주시나요? 그러나 가인은 그냥 화를 냅니다.
상식적으로도 입장바꿔 생각할 때, 내가 누군가를 대접할 때 그 사람이 안 받으면, 안받아?! 하며 화내는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무엇이 안 맞는지를 확인해야 했을텐데.. 가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미 자기중심성이 가득합니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또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아예 스스로 판단하는 죄에 대해 짚어주시고, 그 죄로 인해 발생할 결과를 경계할 수 있도록 말씀해주십니다. 경고와 조언을 해 주신 것입니다.
죄의 심화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벨을 죽이는 일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들로 불러 죽입니다. 우발적인 행동이 아닌 사람이 없는 곳으로 불러내어, 때려서 죽이는, 계획적인 살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보다 더 심각한 죄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 한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가인을 부르며,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가인은 뻔뻔합니다. 자신이 아벨을 지키는 존재냐고 묻습니다. 인간은 서로 돕는 배필인데, 서로를 지키는 존재인데, 오히려 자신이 그런일을 해야 되냐고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자신의 사명을, 인간의 목적을 부정합니다.
그 죄의 결과, 가인은 땅에게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농사꾼인 가인에게 땅에서 어떤 것도 얻지 못하게 되는 저주를 내립니다. 농사꾼이였던 가인은 이제 농사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로 치면 직장에서 짤리고 이직도 불가능하고 어디가서도 일을 못하게 짤린 겁니다.
이를 통해 형벌도 심화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노동한만큼 얻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지만, 가인은 노동을 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기가막히게도 이 상황에서 가인은 여전히 뻔뻔합니다. 자신은 사람을 죽여놓고, 생산수단을 잃은 것에 대해 불평합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자기중심성인 것이죠.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인을 돌로 쳐죽여야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벌을 주시지만, 동시에 가인이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심지어 가인이 회개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하나님을 피도 눈물도 없는 무서운 분으로 봅니다. 성경에 기록된 헤렘(남김없이 진멸하는 것), 그리고 과한 심판(엘리사의 곰 등)을 보며 하나님의 잔혹함을 조명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보면 구약의 하나님도 죄인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십니다.
저주받은 족보의 시작
이제 저주받은 족보가 시작됩니다. 저주받은 족보는 하나님을 떠난, 메시야가 탄생하지 않는 죄인들의 족보입니다.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성을 짓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킬 성을 만듭니다. 세상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가인의 자손인 라멕은 아내를 둘이나 맞이합니다. 원래 인간은 한 사람을 반려자로 맞이하게 되어 있으나, 이제는 자신의 욕심대로 아내를 선택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고, 욕망의 도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멕의 자녀들은 경제와 문화의 조상이 됩니다. 목축업의 조상, 음악(예술)의 조상, 상업의 선구자(조상)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 시대를 살면서 왜 기독교인이 더 부유해지고, 잘나가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대답을 이미 창세기에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더 잘 사는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이 그 영역의 선구자이며, 실력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구원과 안식이 없습니다.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그리고 라멕은 악행을 저지릅니다. 자신의 상처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입니다. 고대인들은 기본적인 사회법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등 동해복수법(피해를 받은 만큼만 피해를 입히는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율법에도 그런 조문이 있지요. 그러나 라멕은 자신이 받은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힙니다.
또한 라멕이 죽인 대상은 '소년' 입니다. 즉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해를 입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자랑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칠 배'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7배의 은혜를 주셨지만, 라멕은 하나님 없이 자신 스스로 자신에 대한 법을 만듭니다.
절망 가운데 희망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느낄 것입니다. 아, 절망이다. 이제 하나님의 세상은 끝이 났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또 다른 자녀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이 불리며,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5장 아담의 족보
성경 공부를 진행하시거나 설교를 하실 때 족보를 다 하나하나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듣는 사람을 괴롭게 할 뿐입니다.
빠르게 보겠습니다.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3절에서 아담은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는데, 아담의 형상은 누구의 형상인가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즉 아담의 자손 '셋'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들이 끊기지 않았음을 말하며, 하나님의 형상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에녹이 여기서 나옵니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므두셀라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은 창을 든자(던지는 자), 파수자 라는 의미를 가지며, 또 다른 직역으로는 '죽음을 보낸다'라는 이름 뜻을 가집니다. 굉장히 살벌한 이름이지요.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아마도 하나님께 심판의 계시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자녀 이름을 이렇게 지었겠죠...심판에 대해 알고 있던 에녹은 항상 긴장하며 하나님 앞에서 행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이 성경에 나오는 것이죠.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1. 승천설
엘리야처럼,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승천했다는 주장입니다. 히브리서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하죠. 그러나 어떤 형태의 승천인지는 모릅니다.
유대교 신비주의자 역시 해당 주장을 따르며, 에녹은 승천하여 천사가 되었다, 에녹서를 내려주었다 등등 다양한 판타지(?)스러운 주장들도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계신 드높은 천상(하 샤마임)만이 있을 뿐이죠. 선지자들이 보는 하나님의 어전회의같은 장소입니다. 그곳은 원래 인간이 있을 수 없는 곳이죠. 그렇기에 승천한 존재는 천사가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죽음설
고대 유대적인 관점에서는 사후세계가 없습니다. 죽으면 모두 쉐올(음부)로 가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에 없었더라'도 죽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를 모르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들을 땐...조금 특별한 죽음 정도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므두셀라가 죽은 해 홍수가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은 므두셀라가 죽을 때 심판을 하기로 결정하셨으며, 므두셀라가 모든 인간중 가장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 심판을 최대한 유예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기다리신 것이죠. 하나님 역시 끝까지 심판하시기보단,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그리고 노아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아담의 족보가 끝나며, 노아의 족보가 시작됩니다.
정리 & 설교포인트
우리는 창세기 4장과 5장을 통해 몇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짚을 수 있습니다.
1. 죄는 점점 심화되어 진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자 했던 아담의 욕심이 만든 죄의 4중 파괴성이 점차 심화되어 갑니다. 가인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라멕은 그 죄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간다면, 죄는 더 큰 죄를 만들며 결국 죄의 결과는 형제를 죽이며, 인간을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고, 약자를 억압하게 됩니다.
2. 죄인의 특성
죄인은 지독한 자기중심성을 가지며,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만 살아가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서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메시야가 나오지 않습니다. 즉 구원이 없으며,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결국 그들의 결과는 끝없는 고통과 무한한 경쟁, 투쟁 뿐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은 죄인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며, 심판을 유예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인에게도 먼저 은혜를 베푸셨으며, 죄악이 가득찬 세상을 심판하는 것도 최대한 유예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에서도 그 하나님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4.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 아벨과 그의 제물처럼 하나님은 제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그 존재 자체를 보십니다. 예배에 나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주 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역시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창세기 4장 5장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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