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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시선/설교 도우미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 사도행전 2장 1-13절

by 바리새뀨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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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사도행전 2장의 1-13절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은 성령강림 후 일어난 제자들의 방언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기억되는 내용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방언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1-13절 본문

항상 설교준비를 하실 때는, 꼭 본문을 자세히 읽으시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간혹 본문을 잘 읽지 않고 설교를 준비하시는 습관이 드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건 설교가 아닌 내 주장일 뿐이므로, 꼭 본문을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장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장 주해 : 성령은 누구에게 임하시는가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은 본래 유대인의 절기로, 한해 첫 수확한 농산물을 제물로 바치는 칠칠절이라는 절기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 승천 후 10일이 되는 날로 이 날을 기념하며, 오순절이라고 이름하여 지킵니다.

 

우리는 흔히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6하원칙으로 구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 오순절에

어디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무엇을: 성령이 오시길 기다리며

어떻게: 뜨겁게 기도하며

왜: ? (성령을 받아야 하니까, 방언을 하기 위해 등등)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길 기다렸던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고, 제자들은 그 명령을 잘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왜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들이 생깁니다.

 

장소: 마가의 다락방

이는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는 주장입니다. 성경에서는 꾸준히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의 집을 예수님과 제자들의 예루살렘 거점으로 소개합니다. 

갈릴리가 본거지였던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이라는 대도시에서 여러 사람이 모일만한 장소가 여러 곳이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따라서 실제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기도하며

우리는 흔히 이때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며 뜨겁게 기도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꽤나 우리 머릿속에 익숙하게 그려집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이미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익숙한 한국 교회에서의 통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어디에도 그들이 기도한 것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성령님에 대한 중요한 이해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은 왜 임하시는가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부르짖어 기도하고, 애타게 성령을 갈구할 때, 어느 순간 갑자기 성령을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굉장히 오해입니다. 동시에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태는 사실 무속신앙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을 애타게 부르면서 갈구하면 신이 내린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선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뜨겁게 기도한다고, 아무리 애타게 부른다고 해서 오시게 할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이 차이를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결정하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누구에게 오시는가

그렇다면 성령은 누구에게 오실까요? 정답은 교회에 모인 사람, 교회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 성경에서 성령은 그럴때 임하십니다. 

 

성경 속에서 성령이 임하시는 상황을 보면 일관적으로 복음을 듣고, 교회에 들어올 때 성령이 임합니다.

그래서 성령받음은 세례와 함께 많이 기록됩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 비둘기 같은 성령, 고넬료의 집안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 등등...)

 

이러한 기록의 이유를 잘 생각해 보면, 교회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 왜 무리한 말이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에 들어온다는 결단은 굉장히 큰 결단이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출교를 각오하는 일이었으며,

이방인들에게는 자신의 모든 사회적 협력점(패트론-클라이언트)을 포기하는 것,

공통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동시에 모든 자산을 헌금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오순절 다락방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최초의 교회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기존 신념(유대교), 고향과 가족, 모든 재산까지도 다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도 당연히,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십니다.

 

우리가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단순히 애타게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뜨거운 느낌일 뿐입니다.

성령을 받고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닌, 바뀐 사람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하신 일: 방언

5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린 자들, 그들에게 임한 성령. 그 성령님은 처음에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방언입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은 우리가 교회 기도회 등에서 듣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닌 명백한 외국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방언의 능력을 통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들)들이 복음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언의 의미

방언은 사도행전에 성령께서 행한 첫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를 방언으로 생각하고 방언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왜 성령께서 첫 역사로 방언을 행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정답부터 말하자면, 성령의 능력과 역사는 "소통"하는 힘입니다.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께서 원하셨던 일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라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절기를 맞아 유대 땅을 방문한 말이 통하지 않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많이 있었으며,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이전까지는 대화할 수 없었던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통할 수 있게 되어,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께서 일으키신 방언의 역사는,

신비한 언어나 놀라운 힘이 아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소통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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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인트

우리는 성령을 받는 것의 의미와 받는 방법,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은 그 본문만으로도 이러한 오해들을 많이 제거해 줍니다.

 

1. 성령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 사람에게 임한다.

 

성령은 우리가 아무리 애타게 부르짖고, 기도한다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행위는 엘리야가 비웃었던 갈멜산의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행동과 비슷합니다.

 

자신의 신념, 신분, 그리고 재산까지 모두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자들에게 성령은 임하십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글을 읽고 설교를 들으실 분들은 이미 기독교인이실 겁니다.

그리고 다들 성령 받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의 신념, 생각, 가진 것, 자산과 돈 모두를 정말로 예수님을 위해 바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분명히 성령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성령의 능력인 방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소통'의 힘이다.

 

우리는 방언에 대해 상당히 많은 오해를 합니다. 어쩌면 성령의 '은사', 즉 성령의 능력으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는 것을 성령 받은 증거로 여기기도 하고, 어떤 기도원에선 방언을 할 때까지 기도를 시키고, 

"코카콜라", "할렐루야"를 반복시키는 곳도 여전히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은 그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었으며, 

성령이 방언을 허락한 목적은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과의 소통이었습니다.

 

현대에도 성령은 '소통'의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소통합니다. 

이전까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대상과, 미워했던 사람과, 내가 피하고 싶던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쉬운 길은 아닙니다.

성령을 받는다고 새로운 힘이 넘치며 시원하고 놀라운 돌파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참고, 더 배려하고, 더 소통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묵묵히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

 

오늘은 이렇게 사도행전 2장의 성령과 방언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설교를 하실 때, 성령과 방언을 그냥 신기한 기적으로 설교하셔서는 안 됩니다.

 

특히 뜨거운 기도로 성령을 받을 수 있게 착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며,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겠다고 결단을 할 때 성령이 내게 오심을 강조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소통의 힘을 주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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