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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시선/설교 도우미

종려주일 의미, 설교 핵심 정리

by 바리새뀨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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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종려주일에 대해 설교의 포인트를 정리하여, 전도사가 없는 상황의 교회의 교회학교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와 같이 정리와 설교 포인트는 가장 아래에 있습니다. 천천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종려주일 관련 본문과 핵심 의미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로서, 4개의 복음서가 모두 다루고 있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종려주일의 기본적인 의미는 세 가지입니다.

 

1. 예언의 성취

2. 왕의 입성

3. 본격적인 고난의 시작

 

먼저 성경 본문별로 핵심 내용을 짚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묘사하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공통점과 차이점

사복음서는 같은 사건을 다루지만, 저자의 관점과 강조점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먼저 공통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심 

모든 저자들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존재했던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나귀 새끼를 탔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 사건이 예언의 성취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

시온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본문이 그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왕(메시아)이 임할 때 평화의 왕으로 임할 것이며, 겸손한 존재로 올 것을 상징하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메시아의 통치를 거절하는 이방인들(특히 헬라-로마)을 심판하실 것임을 예언합니다. 즉 예수님은 예언의 왕임을 명확히 전달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겸손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겸손함이란, 화려한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을 칭찬을 거절하거나, 자신을 낮게 표현하는 것을 생각하지만... 성경의 겸손은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의 겸손은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함

예루살렘 안의 무리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은 모두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익히 알고 있듯이,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이 그들의 기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표적의 소문(요한복음- 나사로의 부활 등)을 듣고, 이제 진짜가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왕의 개선과 복귀 때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바닥에 깔고, 겉옷을 벗어 왕이 땅을 밟지 않게 합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적법한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3. 온 이스라엘이 소란함

예수님의 이러한 입성은 당시 기득권층에게 굉장한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어그로를 끈 것이지요.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온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다 알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온 이스라엘에 알려졌어야 했던 이유는 이후의 사건들에 있습니다. 성전을 폐쇄하신 사건, 성전의 무너짐을 예언하신 사건 등이 이루어지기 위한 준비 단계이며, 동시에 기득권인 제사장-바리새인-서기관 그룹이 예수님을 죽일 결심을 하게 합니다.

 

차이점

복음서별 차이점은 크진 않지만 짚고 넘어갈 내용들이 있습니다.

 

1. 나귀들에 관하여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나귀들에 대한 서술이 조금씩 다릅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나귀들을 가져오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나귀에 대한 서술도 조금씩 다릅니다. '매인' 나귀 그냥 나귀로 나누어집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 이전에 나귀를 타고 입성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좀 잘 나가게(?) 되어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자신이 예언의 메시아인양 나귀를 타고 들어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과 그들이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2.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

마태, 마가, 요한에서는 무리들은 "구원해 주세요!"라는 뜻의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러한 외침은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존재로 인식됨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호산나가 아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는 외침을 합니다. 누가의 저자는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고지할 때 쓰인 평화와 영광이라는 표현을 다시 한번 강조함을 통해, 평화의 왕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의미를 더 강조합니다.

또한 누가는 그러한 외침을 견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치리라"라고 말씀하심을 통해, 이 사건이 반드시 일어날 사건이며 예수님을 알아보는 자들이 없어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설교로서의 포인트

종려주일은 어떤 주제를 잡느냐에 따라 설교를 다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세 가지 포인트를 잡는데, 각각 설교하실 수도 있고 한 번에 설교하실 수도 있습니다. 보셨을 때 자신에게 가장 와닿는 내용을 설교하시면 좋습니다. 설교자는 남을 감동시키려는 목적으로 설교하는 것보단,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눌 때 가장 좋은 설교가 나옵니다. 

 

1. 예언의 성취인 왕이신 예수님에 중점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유월절을 맞이해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바닥에 깔고, 겉옷을 길에 펼치는 것은 개선한 왕, 복귀하는 왕에 대한 복종과 환영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온 힘을 다해 환영했으며, 예수님이란 존재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영원한 약속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지키시고 성취하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왕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서 환영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조금 어긋났지만, 적어도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 역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이 나의 왕이며,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구원자이심을. 그리고 그 예수님을 온 힘을 다해 찬양하며 그분을 우리 마음과 삶 가운데 모셔야 할 것입니다.  

 

2. 무리의 시선에 중점

"호산나-이제 구원하소서!"를 외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강력한 메시아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이 보여준 강력한 기적들처럼, 예수님의 힘과 능력으로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 본격적으로 그 사건이 시작될 것을 기대하였고, 종려나무와 겉옷을 길에 깔며 전쟁에 능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나귀를 탄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좌에 앉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나의 상황을 역전시킬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이 보입니까? 아니면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보입니까?

 

3. 나귀에 중점(순종)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가져오라 하십니다. 어쩌면 당황스러운 명령이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나귀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누군가 갑자기 와서 차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불가능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찾아갑니다.

나귀 주인 역시 흥미롭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그 말에 선뜻 나귀를 내어줍니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의 재산인 나귀를 흔쾌히 제공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귀 주인은 분명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주"라는 그분의 말씀이란 것에 나귀 주인은 집중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주", 즉 메시아라고 부르는 사람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귀를 내어줍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귀 주인이 순종할 때 매여 있던 나귀가 풀려납니다. 그전까지 마구간에 묶여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 나귀가, 단지 새끼에 불과했던 그 나귀가,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자신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 나귀가 온 세상의 왕을 태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묶여있던 것이 풀려나고, 자신의 역할을 못 하던 존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됩니다.

 

위의 포인트들을 잡고, 위의 해석들과 자신의 경험을 잘 믹스한다면 설교하시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이번 종려주일도 은혜 가득한 한 주 되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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